03 넓적다리불가사리
문: 극비동물
강: 불가사리류
목: 유극목
과: 넓적다리불가사리과
보전상태: 평가불가
04 문어
문: 연체동물
강: 두족류
목: 문어목
과: 문어과
보전상태: 평가불가
[버로스] 불가사의해.
[포커틀] 불가사리해.
[버로스] 불가사의 하다고.
[포커틀] 그래, 너는, 불가사리야.
[버로스] (짧은, 침묵) 그래, 나는, 불가사리야.
[포커틀] 나는 문어지.
[버로스] 그래, 너는, 문어야.
[포커틀] 나는 나의 가장 긴 세 번째 다리로 알주머니에 알이 가득 찬 암컷의 몸속에 몇 시간 동안, 아니, 며칠에 걸쳐서……정자가 들어있는 매우 큰 정포를 밀어 넣었었지. (사이) 그리고 몇 달 후에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았어. 나는 왜 아직도 살아있을까?
[버로스] 불가사의하군.
[포커틀] 불가사리한 일이었지.
[버로스] (긴, 침묵 뒤 포커틀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세 번째 다리는 어쩌다가 잘려나간 거야?
[포커틀] 그거야 다리를 잘라서 먹으라고 줬으니까.
[버로스] 누구한테?
[포커틀] 불가사의한테 줬지.
[버로스] (정색하며) 불가사리는 문어를 먹지 않아.
[포커틀] 불가사의는 기분에 따라 색깔이 변해. 흰색은 공포(조명 하얗다), 붉은 색은 분노.(조명 붉다)
[버로스] (천장을 올려다보며) 파란 색은 뭐지? (조명 파랗다)
[포커틀] 불가사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어.
[버로스] 어떤 꿈을 꾸고 있는데?
[포커틀] 물이 차는 꿈, 물이 들어오는 꿈, 물이 넘치는 꿈.
[버로스] 물소리는 안 나는데……(조명 하얗고, 붉고, 파랗다) 지금은 또 어째 저러는 거지?
[포커틀] 잠꼬대를 하는 거야.
[버로스] 잠꼬대?
무대에 불이 꺼졌다가 켜지는 순간, 클림트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 들어온다. 조명 파랗다.
[클림트]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내가 어디다 뒀더라. 도대체 어디다 뒀는지 생각이 안나네. 어디보자, 애들아. 말 좀 물어보자. 애들아 이거하나만 물어보자, 진짜. 내가 여기다 둔 좋은 것을 어디어디에 버렸느냐? 애들아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주면 오늘 일은 다 없던 걸로 해주마. (가위에 눌린 사람마냥 괴로워하며) 너는 내 말이 마음에 둔 말인 양 잘못 해석하고 있다. (한동안 멍하니 벽을 보고 서 있다가, 뒤돌아서서) 10101110101001110101101000110110……(계속 중얼거린다)
[버로스] 깨울까?
[포커틀] 그냥 둬.
[버로스] 좀 시끄러운데.
[포커틀] 가만 두면 저절로 조용해 질 거야.
[클림트] (더 큰 소리로 중얼거리며) 10101110101001110101101000110110……
[버로스] 어째 더 시끄러운데.
[포커틀] 깨어날 때까지만 저래.
[버로스] 우리 말고 또 여기 누가 있나?
[포커틀] (천장을 올려다보며) 불가사의.
[버로스] 응? 나는 왜?
[포커틀] (관객석을 둘러보며) 너 말고 저기 저 쪽 어디, 여기 저기.
[버로스] 나 말고 저기 저 쪽 어디, 여기저기는 언제 깨어나는데?
[포커틀] 여기 이 쪽 어디, 꿈속에서……
[클림트] 1%,2%,10%,47%,79%,79%,79%,79%……(마임;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고 다시 확인한다. 이쪽저쪽 수도꼭지 물이 콸콸 흐른다, 잠그고 돌아서고, 잠그고 돌아서고, 다 잠그고 돌아서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이부자락을 계속 끌어당긴다. 조용하다. 순간, 가위에 눌린 듯 놀라 일어나려 애쓴다.)
[버로스] 왜 저러는 거지?
[포커틀] 버퍼링이야.
[버로스] 버퍼링?
[포커틀] 연락이 끊어진 모양인데, 곧, 괜찮아지겠지.
조명, 꺼질 듯 말 듯 깜박인다.
[버로스] (조명을 올려다보며) 눈이 좀 따갑군.
조명, 꺼질 듯 말 듯 깜박인다.
[포커틀] (조명을 올려다보며) 아! 머리아파.
조명, 순간 번뜩이다가 전부 꺼진다.
[버로스] (어둠속에서) 검은 색은 뭐지?
[포커틀] (어둠속에서) 글쎄, 검은 색은 뭘까?
[버로스] (어둠속에서)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포커틀] (어둠속에서) 어둠 속에 더 짙은 어둠, 더 짙은 어둠 속에 좀 더 옅은 검은 별.
어둠속에서, 크고 작은 불빛들 떠다닌다.
[버로스] (길 다란 불빛을 만지작거리면서) 이건 뭐지?
[포커틀] 저건 내 세 번째 다리야.
[버로스] (손을 쓱쓱 닦는다)
[포커틀] 더러워?
[버로스] 집요한 운명의 촉수를 느꼈을 뿐이야.
[포커틀] 찌릿찌릿했겠군.
[버로스] 따끔따끔했어.
[포커틀] 아팠겠다.
[버로스] 더러웠어.
[포커틀] (짧은, 침묵) 저 것들은 제 몸이 닿기에는 너무 깊고 먼 곳에 캄캄한 속내를, 환하게, 비워. 칠흑 같은 어둠, 짙어지는 어둠, 보이지 않는 어둠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야. (사이) 빛이 든 물길 속은 어찌 그리 눈부시게 아름답던지. 바위 구멍 밖으로 조금 만 더 가보다가 말자, 조금 만 더 가보다가 돌아가자, 하다가도…(사이, 제트기에 탄 사람같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빨판이 달린 여덟 개의 다리를 아주 빠른 속도로 미끌미끌한 몸에 붙였다가 떼었다가 하면서…조금만 더 위로…조금만 더 멀리…조금만 더 가까이…다가가…다가가 보려 애써보게 돼. 그래서 그리하여 그런데…….
[버로스] 그런데 뭐?
[포커틀]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보면, 그리하여 그것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버로스] 더럽나?
[포커틀] 우리가 단지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걸 깨닫게 돼.
[버로스] 단지,
[포커틀] 단지, 그 속에서 나는,
[버로스] 단지, 그 속에서 너는,
[포커틀] 바다에 묵혀뒀던 밧줄을 끌어당기는 선원들과 플라스틱 단지들 속에 든 문어들을 봤어. 그리고…….
[버로스] 그리고?
[포커틀] 쇠꼬챙이에 찔려 단지 밖으로 끄집어내졌지. 나는 살포시살포시 널빤지 밖으로 내려앉고 싶었는데 말이야.
[버로스] 그래서?
[포커틀] 아득히 높고 먼 하늘아래 햇살과 바람은 어찌나 살벌하던지, 다리가 여덟 개나 있는데도 나는 갑판 위에서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바로 그때 그 옆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어.
[버로스] 죽음은 어떤 냄새가 나지?
[포커틀] 작위적인 냄새가 나. 잠깐의 긴장도 놓을 수 없게 하지.
[버로스] 예를 들면?
클림트, 잠에 깨서 일어난다.
[포커틀] 예를 들면, 집인 줄 알고 질그릇 속에 들어갔는데 잘게 깨어진 파쇠들이 온몸에 들러붙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버로스] 끔찍했겠군.
[포커틀] (제 몸의 냄새를 맡으며) 그래,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떼어내려 애썼어. 그런데 이것들이 떼어내려 하면 쉬익 소리를 내고 떼어내려고 하면 뜨거운 김을 올리고는 해서 도무지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가 없더라고. (아주, 긴 사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때 나는 만났어.
[버로스] 뭘?
[포커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버로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포커틀] 불가사의에 이름이야.
[버로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불쑥) 예뻤나?
[포커틀] 그녀의 몸속에서는 검은 물이 뿜어져 나왔었지.
[버로스] 예뻤냐고.
[포커틀] 그녀의 성기는 탄환 같았어.
[클림트] (불쑥 끼어들며) 그건 구멍봉돌이었어.
[버로스] (클림트를 흘낏 쳐다보다가) 예뻤어?
[포커틀] 잘못 건드리면 구멍 속으로 숨어버렸지.
[버로스] (클림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예뻤겠군.
[포커틀] 나는 약간의 물이 든 그 구멍 속을 들여다봤어.
[버로스] (클림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그리고는 세 번째 다리를 쑤셔 넣었나?
[포커틀] 구멍 속은 푸른 동굴 같았어.
[버로스] (클림트가 악수를 받지 않자, 얼쯤해하다가) 좋았겠군.
[포커틀] 그 안에서는 철썩철썩 첨벙첨벙 소리가 났어.
[버로스] 새하얀 거품이 구멍 밖에서 쏴아아 벙글벙글 일었겠다.
[클림트] 그때는 바람이 좀 세서 몇 번이고 다시 낚싯줄을 던져야만 했었지.
[버로스] (클림트와 버로스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응?
[클림트] (혼잣말로 중얼중얼) 가운데에 낚싯줄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납으로 만든 봉돌, 황동으로 만든 봉돌, 텅스텐 합금으로 만든 봉돌, 세라믹으로 만든 봉돌……
[포커틀] 물살이 센 사리발은 피했어야 했는데……
모두 짧은, 침묵.
[버로스] 뭔 말이야?
모두 긴, 침묵.
[버로스] 그러니까, 네 말은 질그릇 속에서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라는 불가사의를 만났고 그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의 몸속에 며칠에 걸쳐서 네 세 번째 다리를 밀어 넣다가 그만 네 크고 멋진 세 번 째
다리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에게 먹히고 말았다는 거고……(사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에워싼 어둠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온 먹물과 같은 것이 되는……그리고 어둠속에 저, 크고, 작은 불빛들은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 떼어다 먹은……
모두 긴, 긴, 침묵. 어둠속을 떠다니는 불빛들을 본다.
[클림트] (손가락으로 불빛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모두, 긴, 긴, 불빛 속. 그림자들 낚시찌처럼 어둠속에서 위아래로 움직인다.
[버로스] 불가사의해.
[포커틀] 그래, 너는, 불가사리야.
[버로스] 그래, 나는, 불가사의지.
[포커틀] (짧은, 침묵) 나는 세 번째 다리가 자라지 않는 문어지.
[버로스] 그래, 너도, 불가사의하다.
[클림트] 그래, 맞다, 불가사의를 잃어버렸었지.
[포커틀] 그래, 맞다, 불가사의를 찾고 있었었지.
[버로스] 그래, 그래서, 네가 여기 저기 어디에 둔 불가사의는 찾았어?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긴, 긴, 혼잣말. 무대 조명 꺼진다.
프로젝트빅라이프(2화)-유인원- (0) | 2018.10.24 |
---|---|
프로젝트빅라이프(1화)-인간- (0) | 2018.10.24 |
프로젝트빅라이프 -해설- (1) | 2018.10.24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