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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감독 봉준호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저능아’로 그릴까?

시네마천국

by 프로젝트빅라이프 2019. 4. 13.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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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생충’ 봉준호 영화에서 봉준호가 한국사회를 ‘묘사’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빈민층과 부유층이 만나는 방식은 ‘과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만남의 방식도 ‘위조’라는 저능한 방식이다. 물론 ‘인디언’ 복장을 한 송광호 모습에서 반전을 기대케 하긴 하지만 이또한 뻔하다. 게다가 봉준호는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을 따라한다는 말을 듣는 감독이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봉준호 영화 해외영화제 수상실패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마더’가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수상에 실패 한 것 역시 그의 영화가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영향을 받은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우회적인 제목도 많을 텐데 제목까지 끌어온 건 흥미롭다. 한국영화에서 ‘충’(蟲)이라는 센 글자는 김기영 감독의 <충녀>(1972) 이래 처음 아닌가. 장르적인 색깔이 도드라지는 제목이기도 하고.



=김기영 감독님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웃음) 더해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 곤충기>(1963)도 함께 떠올렸고. 두분 다 ‘충’자를 한번씩 제목으로 썼다. 포스터도 한자를 강렬하게 써서 보여줬고. 내가 두 감독을 좋아하니 ‘충’자를 넣을 때 오는 이상한 영화적 쾌감이 있더라. 관객에겐 이게 좀 셀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결정 과정에서 이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제목을 붙일 때 일부러 더 위악적인 느낌을 주고 싶더라. 돌이켜보면 <살인의 추억> 때도 그 제목을 반대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살인이 어떻게 추억이 되냐, 제목부터 너무 세다, 무섭다, 부정적이다 그랬다. 그런데 개봉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진거지. <기생충>도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면 수긍할 만한 제목이기도 하다.

출처: 씨네21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가운데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편인 [신들의 깊은 욕망]은 인간의 삶을 인류학적 깊이로 파고 드는 이 사람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한다.



외딴 섬에 사는 원시 부족의 생활양식이 도쿄 건설회사의 용역을 받은 엔지니어 일행의 방문을 기점으로 서서히 파괴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문명화 이전의 인간의 동물적인 삶을 찬미하는 이마무라의 성향을 알게 해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을 문명화된 가치에서 구하지 않고 서구 문명이 이식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이마무라는 영화 속 오키나와의 한 섬에 사는 부족들의 전근대적인 촌락관계와 원시적 성욕과 토속 신앙과 권력관계를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외부 사람들의 힘에 따라 섬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바뀐다. 그들은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 고기를 잡고, 자신들의 땅을 대기업에 팔고, 육지 사람들이 그들을 보듯 스스로도 자신들을 원시인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의 충돌 속에 섬사람들은 뭔가를 잃어버렸으나 승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 섬에는 공장과 공항이 지어지고 관광사업이 시작되며 코카콜라가 도착한다. 이것들이 수 세기 동안 있었던 섬의 모든 것들을 부순다.



영화의 초반부에 섬 원시부족 사람들의 삶을 강렬하게 지켜보던 연출은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기분을 띠지만 조금씩 도시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원시인들의 삶을 그리는 후반부에선 문명과 야만, 과학과 미신, 인간과 동물 등의 대립 속에서 형성되는 드라마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마무라가 이 과정에서 찬양하는 것은 자본주의 문명화 이전 단계에서 간섭받지 않고 발휘되는 자연적 욕망이다. 특이하게도 그것을 이마무라는 근친상간으로 바라본다. 이마무라는 근친상간을 낙후된 지역에서 횡행하는 자연적 충동으로 묘사한다. 남매의 근친상간에서 태어난 아이가 야마토 천황가의 시조가 된 설화, 이 설화는 [신들의 깊은 욕망]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 쌍의 남매이며 그들은 또한 연인이다. 이마무라의 상상력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설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 - 김영진)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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