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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교육, 경쟁사회가 건 최면

사건사고

by 프로젝트빅라이프 2018. 12. 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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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줄세우는 경쟁은 끊임없이 갈고 닦기를 강요한다.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이 박탈감과 좌절감에 힘들어 하든 말든 그들은 맨 앞줄에 선 사람이 '유능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 데 과연 사실일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유명한 조엔롤링은 12번의 거절을 당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돈이 없어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그녀를 위해 집을 마련해주기까지 했다. 





만약 조엔롤링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12번의 거절을 당하고 1번의 기회를 받을 수 있었을까, 는 논외로 그녀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집필을 하는 동안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한국사회는 '패자'가 '승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조엔롤링의 성공은 '경쟁'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재기'할 수 있게 한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는 경쟁의 공정함만을 이야기할 뿐 경쟁의 폐해를 어떻게 헤쳐나갈 지에 대한 고민이 전무하다. 





한국사회는 과도한 경쟁사회이며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능력'있는자로 평가 받는 반면 경쟁에서 밀려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배감에 젖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대한민국 영재교육은 실패했다. 영재학교에 '영재'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과도한 경쟁은 '창의적인 역량'보다 '제도내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게 하고 있으며 실제로 창의적인 역량이 중요 잣대로 평가받는 문학, 공연예술 등에서 처참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표절논란이 있는 영화들 



한국소설, 한국시, 한국드라마, 한국영화, 한국연극, 한국뮤지컬은 베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과도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는 편법을, 또 누군가는 누군가의 눈높이에 맞추기 때문이다. 개성없는 문화예술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경쟁의 순기능을 믿는 사람들은 '공정함'을 기준으로 삼겠지만 '권위'에 기댈 수 밖에 없는 공정함은 악영향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은 유독 평론가의 입김이 센편인데 이들의 평론을 유심히 살펴보면 평론 조차 누군가의 것을 베낀 듯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들의 평론이 미학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경쟁의 공정함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정함은 경쟁이 과도한 사회에서는 발동되기 힘들다. 경쟁사회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다. 소수권위자들의 시선에 의존한 공정함은 불공정을 수반한다. 우리는 떄때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하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객관적 공정함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학벌'과 '경력'을 기준삼고 '보편성'을 논하는 경우가 잦다.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사회에 만들어진 '영재'는 많지만 창의적인 '천재'는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우리나라 영재교육은 초고속 선행학습이다. 빨리 배우는 것을 영재성의 기준으로 삼기에 아이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읽고 계산하는 연습을 한다. 열린 생각을 해야 할 시기에 닫힌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서 '평균'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이 중요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소설은, 한국 시는, 비슷비슷하다. 한국 연극은 개성이 없다. 한국 영화는 짜깁기다. 한국 드라마는 뻔하다, 라는 말은 하루이틀 만에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꺾지 않는다면 한국사회가 말하는 영재는 최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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