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여자황제 남자황제의 집 – 스케치북
(아이2는 무너져가는 허름한 집에서 보라색 알을 낳는 닭을 그리고 있다.)
아이2의 목소리: 아다니아는 보라색 알을 낳는 특별한 닭이었지만 평범한 암탉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어요. 보라색 속살을 가졌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그 맛도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맛이 없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요.
‘
13. 욕실 – 밤
(매달린 남자가 샤워를 하고 있다. 욕실 타일 하수구 아래로 내려가는 붉은 피, 점점 투명해진다. 프랑스 샹송을 흥얼거린다.)
매달린 남자: 때로는 그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지 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무너지는 탑: (발가벗겨진 채 욕조에 누워있다)
매달린 남자: 샤를로트 갱스부르 말이야. 정말이지 끝내주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무너지는 탑: 살려줘. 제발.
매달린 남자: 영어와 프랑스 음악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게 참 들으면 들을수록 묘하단 말이야. 그거 알아?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인거. 그래서 그런가. 프랑스인도 팔레스타인인도 아닌 내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하는 것이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무너지는 탑: 리야드, 나는 말이야. 그냥 조용히 살려고 그랬어. 너도 알잖아. 내 어릴 적 꿈이 전쟁이 없는 곳에서 평범하게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사는 거라는 거.
(무너지는 탑,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매달린 남자: (계속 흥얼거린다) 당신이 떠날 때 Quand tu t'en vas, 급하지 않을 때 que tu n'es pas presse 당신의 몸이 흔들릴 때 ton corps se balance 별 의미 없이 sans importance 있는 그대로 tel que tu es 한 마디 말도 없이 sans dire un mot, 손쉽게 당신이 자조할 때 sans effort tu te moques 당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du decor tu es 이따금씩 de temps en temps 있는 그대로 tel que tu es 당신은 알지 못하죠 tu ne sais pas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ce que l'on dit de toi 당신은 특별히 신경쓰지 않죠 tu t'en fous surtout 무엇도 변하지 않으니 n'y change rien 있는 그대로 tel que tu es...
(매달린 남자, 좌변기 뚜껑 내부에 숨겨둔 총을 꺼낸다.)
무너지는 탑: 가족은 건드리지 말아줘.
매달린 남자: 아무도 알 수 없죠 no one can tell 당신이 다음에 무얼 하고 말하는지 what you say or do next 상처 받았나요 are you blessed 언젠가는 나 때문에 maybe by me sometimes 있는 그대로 come as you are
무너지는 탑: 기억나? 우리가 기적처럼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기로 했었던 거. 그런 의미로 각자의 몸에 타로 문신을 새겼었잖아. 그러니까 제발 내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줘.
매달린 남자: 흠, 글쎄.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 명예를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 우리는 친구니까...
무너지는 탑: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을 게. 너도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 말이야.
매달린 남자: 잘 알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누군가 네 가족을 위협한다면 당장에 모든 것을 네가 털어 놓고 말거라는 걸, 말이야.
(매달린 남자가 소음기를 단 총구를 무너지는 탑의 이마에 갖다 댄다.)
무너지는 탑: (다급하게) 리야드. 내가 널 구해준 거 기억나? 그때 네가 나한테 내가 뭐라고 했지? 이스라엘 군인들이 탱크에 돌을 던진 죄로 네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눈에 덮개를 씌우고 연행하려 했을 때...
매달린 남자: (총을 내려놓으며)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이곳에 없겠지.
무너지는 탑: 이제 네가 날 구해줄 차례야.
(매달린 남자, 잠시 생각에 잠긴다. 무너지는 탑은 매달린 남자가 내려놓은 총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매달린 남자: 투라이야, 난...
무너지는 탑: 가족은 건드리지 말아줘.
매달린 남자: 그래. 알았어.
무너지는 탑: (눈을 감는다.) 쏴.
매달린 남자: 미안해. 나...나도 너한테까지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우리의 목숨은 우리만의 것이 아닌 거.
무너지는 탑: (몸을 떤다.) 내 가족을 지켜줘. 삼촌으로서...
매달린 남자: 하...아. (욕실 밖으로 나갔다가 칼을 들고 다시 들어온다.) 좀 많이 아플 거야. 그래도 참아.
(무너지는 탑 어깨 위에 문신을 칼로 도려낸다.)
매달린 남자: 끝날 때까지만 어디 좀 가있어. (진통제와 붕대를 챙겨주며) 상처가 성나지 않게 붕대는 알아서 잘 갈아주고.
무너지는 탑: (고개를 끄덕인다.)
매달린 남자: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그땐 내가 네게 진 빚이 없으니까, 오늘처럼 망설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무너지는 탑: (고개를 끄덕인다.)
매달린 남자: 방금 전까지 너는 네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이제 네 가족은 네가 지켜. 무슨 말인지 알지?
무너지는 탑: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매달린 남자를 끌어안는다.) 고마워. 리야드. 행운이 너와 함께 하기를 빌어.
14. 팔레스타인 난민촌 – 낮(과거)
(“점령을 중단하라. 샤론 = 테러리트스트” 라고 쓰여진 주택가 벽을 따라 걷고 있는 기자가 사람들에게 뭔가 예길 하고 있고, 간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기자: 돈 얘기는 안 했잖니?
무너지는 탑(과거):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기자: (3.5셰겔을 건네며) 됐지?
매달린 남자(과거): (앞을 가로막으며) 투라이야 만큼 새총을 잘 쏘는 아이는 이 세상에 없어요. 10셰겔이면 거저먹는 거라고요.
기자: (10셰겔을 더 건네며) 더 주고 싶어도 지금은 이거 밖에 없으니까, 그만하고, 집에 돌아가.
(기자, 걸어간다. 아이들 돈을 세보다가 다시 그를 뒤따라 나선다.)
기자: (귀찮아서) 왜 따라와?
무너지는 탑: 아저씨, 기자에요?
기자: 음, 그건, 왜?
매달린 남자: (웃으며) 아저씨가 좋아할 만한 모델이 있는데 아저씨도 보면 좋아할 걸요.
기자: 모델? 그게 무슨 소리니?
무너지는 탑: 여기서 안 멀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저 파란색 깃발이 달린 집 보이죠?
기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그래? 그래서?
매달린 남자: 오늘 안 보고 가면 후회할 걸요. 특종이라고요. 특종.
기자: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너네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무너지는 탑: 가깝다니까요.
기자: 괜찮아.
무너지는 탑: (기자, 팔을 잡아끌며) 돈 안 받을 테니까, 보고가요.
매달린 남자: 아저씨가 좋아할 거라니까요. 그래도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기자: 음. 알았어. 뭐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거나 하면...
무너지는 탑: (앞장서며) 다른 꿍꿍이를 부릴 게 뭐가 있겠어요. 신께 맹세 하건데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어요.
매달린 남자: 보고 놀라지나 마세요.
(앞장서서 걷는 아이들, 이따금, 멈춰 서서 기자가 뒤따라오나 확인하다 다시 걷는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지만 못 들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별: (파란색 깃발이 달린 집에서 휠체어를 타고 마중 나오며) 안녕하세요.
기자: 안녕?
별: 점심은 드셨어요?
기자: (헐렁한 바지를 슬쩍 보다가 태연하게) 음. 아직. 너는 먹었니?
별: 아 이거요. 오래전에 놀다가 좀 다쳤어요.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매달린 남자: (웃으며) 토미는 집에 있어?
별: 응. 그런데 오늘은 몸이 좀 아픈가봐.
무너지는 탑: (가방에서 먹을 걸 잔뜩 꺼내며) 요리는 내가 할 게.
달: (목소리) 왜 집 앞에 얼쩡거리고 있어. 얼른 들어와. 많이 아픈 거 아니니까.
(기자, 아이들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간다.)
매달린 남자: 다른 애들은?
달: 다들 놀러갔어. (기자를 보며) 뭐 좀 먹을래요? 선반위에 과자가 좀 있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손이 좀 이래서.
(기자, 괜히 미안해져서 말이 없다. 별이 과자 통을 집어서 건네준다.
기자: (집안을 둘러보다가) 응? 아! 고마워.
별: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새콤달콤할 거예요. 어때요?
기자: 좀 짜긴 한데 묘하게 중독되는 것이...솜씨가 정말 좋구나.
별: 다른 것도 있는데 더 드실래요?
기자: 그, 그래. 그런데 물은 좀 없니?
은둔자: (불쑥 등 뒤에서) 그거 알아요?
기자: (놀래서) 아 깜짝이야. 바...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은둔자: 비가 며칠 째 안 와서 검정 통에 물이 없어요.
기자: (은둔자가 만지작거리는 타로카드를 흘낏 쳐다보다가) 응? 아! 음.
별: (선인장 열매를 건넨다.) 물은 요리를 할 때만 써야 해요. 그리고 에... 아 그만하죠. 기자라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무너지는 탑: (웃으며) 쟤는 신경 쓰지 마요. 동생 살람이 어제 이스라엘 군인들한테 끌려갔거든요. 별 일 없이 돌아 올 거라는데도...(째려보는 은둔자 눈치를 살피다가) 부탁이 있는데요.
기자: 미안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무너지는 탑: 알아요.
(선인장 열매를 씹는 기자가 인상을 찌푸린다.)
기자: 그럼?
무너지는 탑: 우리 사진 좀 신문에 실어줘요. 우리 기사도.
매달린 남자: (기자에게 받은 돈을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기자: 돈은 필요 없어.
매달린 남자: 당신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기자: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기사에 실릴지 말지는 나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야.
무너지는 탑: 들어보면 생각이 바뀔 걸요.
(해가 저물기 전에 아이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잠시 후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해 저물 무렵 아이들의 집에서 나오는 기자. 아이들이 집 주변에 매단 바람개비를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보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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