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파리 북부 교외 생드니의 한 아파트 – 새벽
(매달린 남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비에 흠뻑 젖은 신발을 벽에 가로세워 놓고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욕실로 들어간다. 프랑스 샹송을 몇 번이고 흥얼거린다. 그때 초인종 울린다.)
매달린 남자: 문 열렸으니까, 들어와.
연인: (우산을 우산 꽂이에 꽂으며) 에디트 피아프. 장밋 빛 인생이네. 그런데 발음이 좀...
매달린 남자: 뭐라고 했어?
연인: (기침하며) 오늘은 노콘으로 해도 돼. 약 먹고 왔어.
(매달린 남자가 머리를 대충 말리고 거실로 나온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연인.)
매달린 남자: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려다 말고) 아 맞다. 괜찮다고 했지?
연인: 뭐 괜찮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음...
매달린 남자: 괜찮은 거 맞아?
연인: (곤혹스럽게) 책임지라고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매달린 남자: (웃음) 진짜지? 나중에 책임지라고 한다거나...할 건 아니고?
연인: 피임약 먹었다니까, 그러네.
(두 사람 격정적인 정사를 치른다. 삐그덕 삐그덕 거리는 침대. 아래층에서 올라온다.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보다 더 커지는 숨소리.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사내.)
사내: 조용히 좀 해. 나 좀 쉬게. 바닥에 이불을 깔고 하든지.
매달린 남자: (문을 열며) 뭐?
사내: 잠 좀 자자. (매달린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이 망할 테러리스트야.
연인: (웃음) 뭐래? 저 땅딸보가.
사내: (들어오려다 매달린 남자에게 가로막힌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매달린 남자: 귓구멍을 막아.
사내: 이거 원. 그걸 말이라고...
매달린 남자: (문을 닫으며) 고자 새끼!
사내: 자... 잠깐만, 이봐. 아니 뭐. (문을 두드리려다 말고 바지를 살짝 내리고 아랫도리를 슬쩍 내려다본다.) 제대로 본적도 없으면서.
매달린 남자: 우리 어디까지 했지?
(두 사람 미친 듯이 끝까지 한다.)
연인: (헐떡이며) 거기서 탈출하지 못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매달린 남자: 올리브 나무를 심었을 거야.
연인: (웃으며) 올리브?
매달린 남자: 예루살렘 성과 올리브 산의 중간 즘에.
연인: (연극배우처럼)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매달린 남자의 손을 본인의 가슴에 가져가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매달린 남자: (다시 물건을 세우며) 너는 내 마리아야.
연인: 그럼 넌 부활한 예수?
(두 사람 다시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지쳐서 나란히 침대에 눕는다.)
매달린 남자: 내가 죽으면 말이야.
연인: 응?
매달린 남자: 아니야.
연인: (돌아누우며) 싱겁긴.
매달린 남자: 배고파.
연인: (침대에서 일어난다) 뭐 좀 먹을래?
(매달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병에서 포춘쿠키를 꺼내 먹는다. Lucky! Have a nice day!)
매달린 남자: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연인: (물에 녹인 염소요구르트에 절인 양고기를 가져오며) 배 좀 채워. 감상에 젖지 말고.
(연인이 양고기를 내밀자 매달린 남자가 허겁지겁 먹는다.)
매달린 남자: 향이 좋은데? 감람유(*감람나무 씨로 짠 기름)는 어디서 났어?
연인: 그제 까르푸에서 장을 좀 봐왔어. 없는 게 없어. 그곳에는.
매달린 남자: 총도 있나?
연인: (웃으며) 산타클로스와 장난감 총은 있어.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옷을 챙겨 입고 나가면서)
연인: 자살폭탄 조끼를 입은 레고도 있지.
매달린 남자: 진짜?
연인: (손을 잡으며) 당신은 진지한 것만 빼면 완벽한데 좀 아쉬워.
매달린 남자: 쉽게 생각 할 일도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연인: 여기서 이렇게 살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거지. 왜 자꾸 그리워해? 뭐 볼게 있었다고.
매달린 남자: 그리워하지 않아. 다만 잊지 못하겠는 거야. 지금도 내 가슴팍에는 총알이 박혀 있다고.
(문을 닫고 나간다. 캄캄한 방, 커튼이 처진 창을 때리는 천둥번개. 문밖에서 여전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연인: 당신 혹시 나 몰래 아직도 ‘타로들’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지?
매달린 남자: 응?
연인: 나 몰래 걔들 만나고 다니지 마. 그땐 정말 나하고 끝이니까!
매달린 남자: 아, 맞다, 우산을 안 가지고 왔네.
(문을 연다. 살짝 열린 창, 커튼이 바람에 펄럭인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비. 매달린 남자 창문을 닫고 우산을 쥐고 나오려다 말고 뒤돌아본다. 다시 열린 창문. 창문틀에 책을 받쳐놓고 나온다.)
연인: 뭐하다가 이제 나와?
매달린 남자: 창문이 자꾸 열려서.
연인: 우산은?
(매달린 남자, 우산을 가지고 나온다.)
연인: 정신머리하고는.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데, 왜, 거기는 잊지 못하고 잘 찾아가나 몰라.
매달린 남자: 거기 어디?
(연인, 대답은 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간다.)
매달린 남자: (뒤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응?
연인: 내가 모를 줄 알아?
매달린 남자: 뭘 아는데?
연인: 당신 친구들이 뭘 하고 싶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든 간에 하지 마. 그런 건 우리한테 아무 도움도 안 되니까.
매달린 남자: 그럼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는데?
연인: 나도 몰라, 하지만, 음, 도움이 안 되는 것쯤은 알고 있어. (매달린 남자의 입에 입을 맞추며) 그냥 좀 살자. 우리. (매달린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유투브 그만 좀 보고.
매달린 남자: 난 디스커버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연인: 그래? 미안해. 그렇지만...너 야생동물들 보는 거 안 좋아했잖아. 피 보는 거 싫다고.
매달린 남자: (멋쩍게 웃으며) 피는 당신한테서 매일 보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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