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프랑스 고등 미술학교(아침)
(타로가 첫째 딸을 학교에 바래다준다. 첫째 딸이 수업이 있는 미술실로 뛰어 들어가고 수업이 시작되면 타로가 창문 밖에서 교실을 들여다본다. 교실은 2층 구조로 되어있고 다락방 같은 위층에는 준비실이 있다. 타로는 첫째가 그리고 있는 아몬드 나무를 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가 쨍쨍하다.)
미술선생: (첫째를 보며) 제법이네. 색감이 좋구나. 붓질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따로 미술을 배운 적이 있니?
첫째: (부끄러워하며) 아...아니요. 그건 아닌데 엄마가 그림을 잘 그려요. 어디서 따로 배우거나 한 건 아니지만.
미술선생: 재능 있어. 열심히 해보렴.
첫째: (붓을 잡고 있는 오른 손이 덜덜 떨린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미술선생: (다른 학생한테 가려다말고) 배경색이 적색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니?
첫째: 그, 그게.
미술선생: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하기 힘들면 나중에 말해도 돼. 더 오래 더 많이 보고 필요하다면 눈으로만 보지 말고 그리고 싶은 대상을 만져도 보렴. 그러면 네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색깔들이 너에게 귓속말을 하게 될 거야.
(첫째가 귀를 만지작거린다. 타로도 귀를 만지작거린다.)
17. 예술의 다리 (저녁)
(벤치에 앉아있는 타로에게 다가오는 매달린 남자, 그의 손에는 콜라와 햄버거가 들려있다.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인다.)
타로: 처리했어?
매달린 남자: (남은 콜라를 빨대로 빨아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타로: 살려달라고 하던가?
매달린 남자: 아니. 그는 그냥 아무 말 없었어.
타로: 정말? 의외군.
매달린 남자: (손가락질하며) 나도 여기 다리에 열쇠를 매달았는데 도무지 어디에 달았는지 기억이 안 나. 찾았으면 좋겠는 데 말이야. (열쇠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타로는 최대한 다리 난간에 붙어서고 매달린 남자는 히스테릭하게 웃어대면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깊은 관계는 사람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어. 때론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타로: (아몬드 비스킷을 매달린 남자에게 먹으라고 권한다. 그가 거절하자) 어릴 적에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 꽤 유명한.
매달린 남자: (웃으며) 처음 들어보는 말이야. 네가 화가를 꿈꿨다니.
타로: (아몬드 비스킷을 다시 권유한다.) 그런데 내가 색맹이거든. 빨간 색과 초록색을 구별하지 못 해.
매달린 남자: 재밌네. (아몬드 비스킷을 먹다가 뱉으며) 너무 달아.
타로: 오늘, 첫 째가 그린 아몬드 나무를 봤어.
매달린 남자: 솜씨가 좋던가?
타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제법이더군. (매달린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마음이 약해지는 게 당연해. 사람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말아줘.
매달린 남자: 응? 아니 무슨. (잠시 생각하다) 보여줘?
타로: 됐어. 널 안 믿으면 누굴 믿을 수 있겠니?
(두 사람 한동안 말이 없다. 다리 아래로 유람선 지나간다. 바람이 쌩쌩 분다.)
타로: 그가 이제 우리 옆에 없다고 생각하니 슬퍼.
매달린 남자: 쟈끄프레베르는 여기서 자주 명상을 했다고 하더군. (갑자기 시를 읊는다) 그는 머리로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는 마음으로는 ‘그래요’라고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래요’라고 말한다. 선생님에게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온갖 질문이 그에게 쏟아진다. 갑자기 그가 미친 듯이 웃는다. 그리고 그는 모든 걸 지운다. 숫자의 말과 문장과 함정을 갖가지 분필로 …… (타로를 보며) 너는 모든 걸 지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타로: 알아. 알지만 우리는 지울 만한 걸 아직 칠판에 쓰지 않았어.
매달린 남자: 안다고? 네가?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야만 해.
(연인들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조금 더 진한 애정행각을 나눈다. 유람선이 참 많이도 다닌다. 한쪽 에서는 거리 극 공연이 한참이다.)
타로: 그런데 이건 좀 다른 애긴데 너는 왜 열쇠를 강에 던지지 않았니?
매달린 남자: 그냥 뭐. (거리 극 공연을 보며) 정말 멋진 나라야. 다들 잘 웃고.
(타로, 박수를 치고,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타로: (외발 자전거를 타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광대의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넣으며) 잘 봤어요! 좋아요, 좋아!
18. 타로의 회상 (밤)
(철조망과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덤프트럭 한 대. 그 뒤로 보이는 피난민 행렬。 초소를 통과하는 몇 분 간 덤프트럭 물탱크 속에 숨어있는 타로와 여자교황, 손을 맞잡는다.)
타로의 목소리: 운이 좋았어. 몇 분만 이대로 있으면 다 지나 갈 거야. 주말에는 … (여자교황의 부른 배를 보며) 우리 셋이 산책도 좀 하고.
여자교황의 목소리: (웃으며) 딴 사람 같아.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타로의 목소리: 어쩌면.
여자교황의 목소리: 어쩌면?
타로의 목소리: (웃으며) 어쩌면 롤러스케이터를 함께 타면서 함께 비명을 지르게 될 줄도 모르지. 손을 어디에 둘 줄 몰라 하면서 말이야.
19. 예술의 다리(밤)
(폭죽. 폭죽이 시끄럽게 터지고 있다. 카메라는 매달린 남자와 타로를 비춘다. 두 사람 대화를 시도하나 주변이 시끄러워서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
매달린 남자: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타로: (깜짝 놀라며) 응?
매달린 남자: 아니야. 됐어.
타로: 나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야. 어찌됐든 그는 우리 형제였으니까.
매달린 남자: (강물에 뜬 유등 불빛을 보며) 나는 이제 지쳤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정작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들은 단 한명도 죽이지 못했어.
타로: (웃으며) 아, 정말 시끄럽군. 이놈의 나라는 왜 이리 터뜨리는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 기분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펑펑 아무데나 막 터뜨려. (일어나며) 피곤하군. 이제 그만 집에 가봐야겠어.
매달린 남자: 가려고? 왜, 좀 더 있다가지 않고.
타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손에 쥐어주며)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한데 써.
매달린 남자: 필요 없어. 가지고 가.
타로: (웃으며) 또 연락할게.
(예술의 다리를 건너는 타로, 홀로 남겨진 매달린 남자는 손에 쥐어진 돈을 벤치에 그대로 두고 반대편으로 걷는다.)
20. 프랑스 성당(아침)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미사집전을 하는 80대 신부. 신자로 가득 찬 성당에 뒷문을 통해서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 두 명. 그들은 신자들을 칼로 위협해 성당 밖으로 쫒아내고 80대 노 신부와 수녀 두 명을 인질로 삼는다.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괴한1: 신부님 안녕하세요.
신부: ……
괴한2: (칼을 신부의 목에 갖다 대며)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어요. 당신은 다만 오늘 운이 좀 없을 뿐이에요.
신부: 카만이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폭력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려. 애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니 왔던 문으로 다시 나가렴. 그러면 되는 거야.
괴한2: 칼을 들고 들어 온 순간 돌이킬 수 없어요. 신부님, 나는 치유기도를 받으려고 줄을 선 신자가 아니라고요.
괴한1: 뭐해? 그냥 확 그어버리지 않고.
(성당을 에워싸는 경찰 기동대.)
신부: (눈을 감으며)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괴한2: (눈을 질끈 감고 칼로 목을 그으며) 알라 후 아크바르.
괴한1: (달달 떨고 있는 괴한2를 보며) 잘했어. 마저 다 처리하고 가자.
(신부 목을 잡고 있다. 수녀들, 운다.)
괴한2: 못하겠어. 그만하고 가자. 애초에 신부 한 명만 죽이기로 했잖아.
괴한1: (성당 밖을 에워싼 경찰들을 보며) 이러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괴한2: 신부님 오늘은 이스라엘이 우리 땅을 점령한지 70년째 되는 날이에요. 제 동생들 이야기를 했던가요? 우리는 이스라엘 비행기가 폭발물을 마을에 쏟아 부을 때마다 포도밭에 숨고는 했었는데, 그날 동생들은 낮잠을 자느라 포도밭에 가지 못했어요. 고작 여섯 살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 적어도 신부님은 항상 끝을 생각하고 있을 나이잖아요.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요.
신부: 너도 끝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잖니?
괴한2: (곁눈질하며) 당신이 갈 천국에 렌즈콩과 타분 빵이 있길 기도할게요.
(괴한 둘, 성당 밖으로 천천히 나온다. 총성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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