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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파시파에(그리스어: Πασιφάη)

프로젝트빅라이프/싸이코패스신은죽었다

by 프로젝트빅라이프 2018. 12. 1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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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길을 잃었어. 그런데 누구야? 이 아가씨는.”

……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또 납치했구나. 그런데 어째 네 아버지한테 데려가지 않고?”

데려갔었지.”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죽었었는데 내가 살렸어. 뭐 말하자면 길어.”

메두사가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녀의 사랑스런 아가들은 입을 벌리고요.

 

넌 도대체 뭘 살린 거니?”

 

사실, 그녀를 살렸다기 보다는 그녀의 지위를 재배치했다고 하는 게 맞겠죠.

나는 멸종된 종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그녀를 복제해냈습니다. 체세포에서 핵을 떼어낸 뒤 여성의 난자의 핵과 바꿔치기 해 넣고 그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 시킨 핵치환 방법이 아니라 게놈편집이라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DNA염기서열을 원하는 서열로 바꿔치기하는 방법이죠. 베스 샤피르 교수가 쓴 메머드를 어떻게 복제할까, 라는 책을 참고해서 만든 자동 염기서열 스캐너에 DNA를 넣으면 가장 긴 가닥의 염기와 가장 짧은 가당의 염기가 합성됩니다. 이 방법을 통해 그녀의 몸에 신과 인간의 유전자가 적절히 섞이게 된 거죠.

 

앞에 세워놓고 무안하게 내 이야기를 둘이서만 나눌 거예요?”

 

벼리는 뾰루퉁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봅니다.

 

너는 착한 아이야. 그래서 네가 두려워

메두사가 꺼림칙한 느낌을 애써 지우려다 말고 말을 잇습니다.

 

네가 가진 능력은 네 것이 아니니까. 어떤 결과를 내는지도 너는 모를 거고, 호기심에 무작정 사용해 볼 테지. 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처럼. 너도 제멋대로 굴지도 몰라.”

 

메두사가 말하는 그녀는 제 어머니입니다. 생전에는 내 아버지 하나님의 발밑에 붙어 있던 그림자였죠. 검은 형상에 불과한 그림자가 아니라 내 아버지 하나님이 먼 옛날 제 멋대로 발밑에 붙여 버린 여신입니다. 상상해보세요. 강간범의 발밑에 나체 상태로 붙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겁탈 당하는 여성을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잃어버린 걸 찾아줬어요.”

그건 나도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고맙게 생각하면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 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옆에서 벼리의 말을 거듭니다.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여기에 갇히게 된 거야?”

말하자면 길어.”

구구절절한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길면 하지 마요. 별로 안 궁금하니까.”

 

벼리가 괜한 심술을 부립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나는 이곳에 버려져 있었고 나가는 길을 못 찾아 헤매다가 나처럼 여기에 버려진 반인반수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지.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노타우로스?”

 

메두사는 파리카타콤 지하납골당이 전설 속 미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황당한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나저나 미노타우로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는 어디에 있나요?”

 

벼리가 묻습니다.

 

그는 죽었어.”

누가 죽였죠?”

누구든 죽지.”

 

생각해보니 벼리는 나이를 먹고 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적이 없네요.

늙고 병들고 지친.

 

그는 털이 다 빠진 늙은 황소였어.”

……

실수로 자른 내 머리를 다시 돌려준 친절한 노인이기도 했고.”

……

그는 많이 힘들어했어.”

어째서요?”

이도 다 빠진데다가 목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나서 먹은 것들이 줄줄 셌거든.”

?”

. . .”

 

메두사는 본인이 말해놓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대고 웃습니다. 그렇게 혼자 한참 홀린 듯 웃다가 쓸쓸하게 말을 이어요.

 

약해빠진 괴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약해지면 독해지기라도 해야 하는 법인데 미노타우로스도 메두사도 그렇지는 못한 모양이네요.

 

불쌍해.”

누가요?”

괴물로 불리는 모든 것들이. 그리고 내 머리카락이 된 뱀들이

숲에 풀어줘요.”

여기에 숲이 어디 있니?”

 

메두사가 묻습니다.

벼리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녀의 뱀들을 맨손으로 잡아요.

블랙맘바의 맹독이 온몸에 퍼질지도 모른데 말입니다.

 

숲은 제 발 밑에 가만히 있어요.”

 

메두사의 머리에서 뱀들은 사라집니다. 내내 인상을 쓰고 혀를 내밀고 있던 메두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쓸어 올려요. , 여전히,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나무 밑에 둥지를 튼 새들이 머리를 날개깃에 묻는 숲, 말이에요.”

뱀들이 살기 좋겠군.”

둥지에서 떨어지는 새알도 많고 덩굴 밑에 구멍을 파고 사는 쥐들도 많고.”

뱀이 부러워지네.”

나는 벼리의 발밑에 깃든 그런 숲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일은 그냥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은 법이거든요. 어쨌든 벼리는 이곳에 왜 왔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벼리가 껴안은 메두사는 아르놀드 드 부에즈의 두 팔과 두 다리의 습작 같습니다. 많은 것들이 지워지고 많은 것들이 채워져요. 빼어난 미인이었던 메두사를 흉측한 괴물로 만들었던 저주는 그녀가 죽음으로서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날개달린 백마 페가소스와 게리온의 아버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어요. *크리사오르는 황금 칼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황금빛 칼은 메두사의 머리카락 색깔과 똑같습니다.

메두사의 주검 속에서 잉태된 괴물들이죠.

그들은 모두 벼리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메두사는 왜 죽인 거야?”

그녀는 태풍이 됐어요.”

?”

 

뜬금없는 말이지만 딱히 따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애초에 메두사를 만나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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