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진짜 너무 더워서 진이 다 빠졌어요.
앵무새
추워죽겠는데 문은 누가 열었어?
웬디
시원해서 참 좋다.
앵무새
(한동안 말이 없다. 이를 악물고 웬디를 빤히 쳐다본다)
웬디
(호주머니에서 풍선껌을 꺼내 쫙쫙 씹고 불고 터뜨리기를 반복하다) 씹으실래요?
앵무새
안 뜯은 걸로 줘.
웬디
안 뜯은 건 없어요. 이거라도 씹으세요.
앵무새
(풍선껌을 꺼내 쫙쫙 씹고 불고 터뜨리기를 반복하려다 불쾌해진 표정으로) 손 좀 줘봐. (껌을 뱉는다) 단물 다 빠졌어.
웬디
(자지러지게 웃는다) 틀니도 빠지셨어요. 할머니 휑한 입 구멍은 마치 나무구멍이나 바위틈 같아요, 새들이 둥지를 트겠어요. 삐약삐약 쫑알쫑알. (웃다가 울다가 하다가 정색하며) 춥네요. (틀니를 돌려주지 않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앵무새
(몸을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놓았다, 하다) 단물 다 빠졌다.
발정 난 길고양이 소리 들린다. 504호 방문 열렸다가 닫힌다. 바가지에 물 한바가지 바닥에 쏟아진다.
피터팬
(물에 흠뻑 젖은 고양이 마냥 몸을 털며) 다링부인입니다. 발정 난 고양이를 싫어하죠.
팅커벨
(물에 흠뻑 젖은 고양이 마냥 몸을 핥으며) 그녀는 다 싫어해요.
피터팬
특히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와 냄새나게 씻지도 않고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싫어합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쉽게 울적해집니다. 주변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갑자기 불안해하고 갑자기 초조해하고 갑자기 자해를 합니다.
504호 방문 열렸다가 닫힌다. 각종 물건들 죄다 바닥에 나뒹군다. 웃다 울다 하는 소리 들리다가 만다.
팅커벨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저러다가 아기도 내던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피터팬
(삐라를 두 손으로 펼치며) 이 동네는 무서운 곳입니다.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친자식을 죽이고 팔고 버립니다.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자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압박감을 느낄 때마다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범죄계획을 세웁니다.
팅커벨
(삐라를 두 손으로 펼치며) 형법 제 250조2항.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합니다.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합니다.
피터팬
14세 미만 형사미성년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습니다.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합니다. 농아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합니다.
팅커벨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할 때 상대의 피해 정도가 나의 피해 정도보다 적어야합니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할 때 상대보다 먼저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할 때는 안 됩니다. 누군가 나를 해치고 있을 때만 정당방위가 성립됩니다.
504호 방문 활짝 열린다. 다링부인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금방이라도 품에서 떨어질 것 같다.
다링부인
(영국 자장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잘 자라 아가야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이 불면 요람이 흔들거리지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요람도 떨어지겠지 요람과 아기가 떨어지겠지 (노래를 끊고 시퍼런 멍이 들게 아이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아가, 아가, 나쁜, 아가, 조용히 해, 오, 이 시끄러운 것아 지금 조용히 해 아니면 나폴레옹이 이 길을 지나 갈 거야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아가, 아가, 그는 거인이야 뚜앙의 철탑처럼 거대하고 시커멓지. 그는 그 철탑에 의지 하여 아침도 먹고 저녁도 먹지 나쁜 사람들을 매일 잡아먹지 (아기 운다, 쥐 잡아 먹을 것 같은 입술로 표독스럽게) 아가, 아가 네 소리를 들으면 그가 집으로 뛰어와서 고양이가 쥐를 찢어 죽이듯이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거야 그리고 널 마구 때리고 또 때릴거야 곤죽이 될 때까지 때릴거야 그리고는 한, 조각, 씩……널 물어뜯어서 너를 먹어 치울, 거야.
아기, 계속 운다. 다링부인 무서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만 본다. 을씨년스런 바람소리. 어둠 속에서 고양이‘네버랜드’, 눈, 번쩍인다. 무대 전체로 시퍼런 인광이 퍼져간다. 문턱에 가만히 앉아 있던 302호 앵무새 죽은 듯 쓰러진다. 301호 문 열린다.
12월32일
웬디
(밖으로 비죽 나온 앵무새 발바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간질, 간질, 간질. (짧은 침묵) 근질. 근질. 근질. (조금 긴 침묵) 간질, 간질, 간질. (아주 긴 침묵) 간질, 근질, 간질, 근질, 간질, 간질, 근질근질.
정적
피터팬, 팅커벨
(서로 간지럼을 피우며) 간질간질간질, 근질근질근질. (둘 다 숨넘어가게 웃는다, 섬뜩하다)
정적
웬디
간지럼 안타는 체질이신가보네요. 나는요. 옆구리만 누가 쿡 찔러도 깔깔깔깔깔깔 자지러질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다가, 호주머니에서 틀니를 꺼내며) 아, 맞다. (입을 벌려 틀니를 끼워주고는) 간질간질간질, 근질근질근질.
정적
다링부인
간질간질간질, 근질근질근질. (아가, 까르르 웃는다. 숨넘어갈 것 같다)
정적
웬디
(양발을 벗어 앵무새 발에 신겨주며) 오늘은 땀이 뻘뻘 나고 지치는 하루였어요. 꼬맹이 때는 초겨울만 되도 너무 추워서 겨울잠바 겨울바지를 모두 입고 잠을 잤었는데요, 언제 부터인가 몸에 열이 많아져서 한 겨울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녀도 춥지가 않아요. 체질이 바뀐 걸까요? 어른이 돼서 그런 걸까요? (사이) 꼬맹이 때는 엄마아빠가 다음날 숨을 쉬고 있지 않을까봐, 몇 번이고 의사마냥 콧잔등 밑에 두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했었어요. 지금도 그, 숨 막히게 따뜻했던 열기로 가득 차 있던 숨소리의 감촉을 기억해요. 아시잖아요. 어떤 소리들은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다는 거.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그 소리들이 전부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괜찮다, 괜찮다, 손 포개주던 큰 손이 작아졌어요. (사이) 이제는 이상한 소리들만 들려요. 제 주변에는 저를 할퀴고 물어뜯고 꼬집는 소리들만 남았어요.
피터팬
다 아실 테니 이상한 소리는 안 하겠습니다.
팅커벨
아이들이 보고 배우니까, 이상한 소리는 안 하겠습니다.
다링부인
매음굴에서 추잡스런 몸이나 파는 똥갈보년!
피터팬
추잡스런 몸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꽤 예쁜 몸을 가지고 있죠. 들어갈 때는 들어가고 나올 때는 나왔어요.
팅커벨
그래요. 그녀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샘이 날 만큼 예쁜 몸을 타고 났습니다. 타고 난 걸 파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싶네요. 다들 타고 난 걸 팔면서 살잖아요. 재물을 타고 난 사람은 재물을. 명예를 타고 난 사람은 명예를. 머리를 타고 난 사람은 머리를. 타고 난 게 없으면 타고 나보려고 애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다링부인
밑구멍이 다 헐어버린 화냥년!
정적. 후크선장 아랫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504호 다링부인 눈치를 보다가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들어간다.
후크선장
(504호를 올려다보다가, 은근슬쩍 웬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느끼하게) 이 세상에는 아이인 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기도 하지. 이해할 수 없는 명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롱뿐이야. 우리 같은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명제가 되어야만 해.
피터팬
후크선장은 웬디에게 개수작을 걸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됐는데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그럴싸하게 끼워 넣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런 구닥다리 수법이 통하겠습니까?
팅커벨
그렇게 안 봤는데 목소리가 제법 섹시하네요. (사이) 후크선장은 밤도둑입니다.
웬디, 앵무새 눈꺼풀을 열어본다.
후크선장
(시집을 펼친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제 막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팅커벨
후크선장은 시를 낭송하기에 좋은 목소리를 가졌어요.
피터팬
목울대를 가진 남자의 개수작일 뿐입니다.
팅커벨
피터팬은 목울대가 없어요.
피터팬
목울대는 테스토스테론이 성대를 둘러싼 갑상연골을 크게 해서 목 앞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것, 뿐입니다. 전문 용어로 목에 혹이 생겼다고 하죠.
웬디, 앵무새 어깨를 두드려보고 숨을 쉬는지 확인한다. 앵무새 축 늘어져서 움직임과 호흡이 없다가 짧은 경련 이어진다. 웬디, 가슴 중앙에 손꿈치를 놓고 손가락은 깍지를 끼고 앵무새 가슴을 세게 누른다. 새처럼 파닥인다. 새처럼 지저귄다. 무대 조명 깜박인다. 무대 아래 앵무새 한 마리 우리에 갇혀 있다.
피터팬
잘 가, 안녕, 또 봐.
앵무새
잘 가, 안녕, 또 봐.
피터팬
앵무새라 그런가 말을 곧 잘 따라하네요.
앵무새
어린애라 그런가 말도 곧 잘 따라하네요.
피터팬
음------
앵무새
음------(피터 팬 만화 주제가, 세상을 날개삼고) 세상을 날개 삼아 비상할거야. 끝없는 하늘을 날거야. 영원히 아이로 남을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만날 내 운명이지. 세상을 날개 삼아 비상할거야. 끝없는 하늘을 날거야. 영원히 아이로 남을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만날 내 운명이지. 꿈과 현실사이를 날거야. 떨어지면 아프겠지. 하지만 내가 웃을 때도 울 때도 너는 내 곁에 있겠지. 그리고 난 다시 일어 날거야. 세상을 날개 삼아 비상할거야. 끝없는 하늘을 날거야. 영원히 아이로 남을 거야. 그게 바로 내가 만날 내 운명이지. 날거야. 날거야. 날거야. (사이) 음------, 잘 가, 안녕, 또 봐.
팅커벨
음------, 잘 가, 안녕, 또 봐.
정적
웬디
(앵무새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빼려고 애쓰면서) 이상하게, 숨을 안 쉬어요. 이상하게, 손발이 다 차요. 이상하게, 입술이 퍼래요. 이상하게, 온몸이 딱딱해요. 이상하게, 입을 벌리고는 닫지를 않아요. 이상하게, 눈을 뜨고는, 눈꺼풀을 깜박이지도 않아요. 이상하게,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이 없어요. (금반지를 빼서 끼고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왜 그런 거죠?
후크선장
(웬디, 머리카락 냄새를 느끼한 표정으로 음미하며) 그녀는 죽은 듯 잠을 자.
웬디
(죽은 앵무새의 목걸이를 목에 걸면서) 고요해요. 어떻게 이렇게 곤히 주무실 수가 있죠?
후크선장
그거야 나야 모르지. 깨어나면 한 번 물어봐. 어떻게 하면 세상도 모르게 쥐 죽은 듯이 잠들 수 있는지.
302호 앵무새, 두 팔 축 늘어진다. 고양이‘네버랜드’꼬리를 바짝 세우고 유유히 무대를 가로지르다 사냥감을 발견한 듯 몸을 잔뜩 웅크린다. 우리에 갇혀 있는 앵무새 날개를 부지런히 날개를 퍼덕인다.
피터팬
네버랜드가 갸르르르, 갸르르르, 거리면서 머리를 낮추고 엉덩이를 씰룩씰룩 거리는 거 너무너무 귀엽지 않나요?
앵무새
날거야. 날거야. 날거야.
팅커벨
앵무새는 날 수 없어요. 왜냐면 날 수 없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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