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
아이가 이유 없이 어른이 되는 것처럼. 세상에는 까닭 없이 그렇게 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네버랜드, 앵무새 날개를 문다. 앵무새 파닥인다.
후크선장
그건 죄다 가짜야.
웬디
자는 게 아닌가요?
후크선장
아니 그 목걸이 그 반지 말이야.
웬디
가짜면 뭐 어때요? 예쁘기만 하면 되지. (다시 앵무새에게 돌려주며) 그런데 이게 가짠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후크선장
내가 팔았거든.
웬디
얼마에 주고 사서 얼마에 팔았는데요?
후크선장
만원에 주고 사서 삼십 오만 원에 팔았지.
웬디
한 개당?
후크선장
두 개 합쳐서.
웬디
꼴에 양심은 있으시네요.
후크선장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저 늙은 여자는 저게 진짜 인줄 알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마냥 좋아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닌가? 가짜, 진짜가 따로 있나?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고 가짜라고 믿으면 가짜인거지.
웬디
말도 안 돼. 가짜진짜는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거예요. 단수가 아니라 복수여야만 하는 거예요. 진짜를 만들었든 뭘 했든 간에 그걸 진짜라고 믿는 사람이 한명밖에 없으면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504호 다링부인 비명을 지른다.
다링부인
(목소리) 내 아기는 가짜야. 진짜라면 나한테 이럴 수 없어. 열 달 동안 내 뱃속에서 내 얼굴과 내 몸매와 내 미래까지 모두 야금야금 망가뜨려 버린 게 분명해. (흐느낀다) 내 얼굴은 마침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진저리치게 못 견뎌 하는 흉측한 것이 되고 말았어. 다 너 때문이야. 다 네 탓이야. (아기 운다, 칼등으로 마늘 찧는 소리 점점 커지면 차츰차츰 아기 울음소리 잦아든다)
피터팬
(발로 박자를 맞추며)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앵무새
(네버랜드를 부리로 쪼아대며)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팅커벨
(손뼉을 치며)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504호 다링부인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주변을 살펴보다 쓰레기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쓰레기봉투 터진다. 조명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스미
(쓰레기봉투에서 기어 나오며)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12월33일
웬디
몇 시죠?
후크선장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그건 왜?
웬디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후크선장
뭐가?
웬디
504호요.
후크선장
새벽 두시야. 자나보지.
웬디
한 번 올라가서 확인 해 봐요.
마릴린맨슨 - the nobodies.
We are the nobodies
we wanna be somebodies
when we're dead,
they'll know just who we are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죠
우리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길 원해요
우리가 죽었을 때
그제서야 그들은 우리가 어떤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거에요
Some children died the other day
we fed machines and then we prayed
puked up and down in morbid faith
you should have seen the ratings that day
몇몇 아이들이 어느날 죽었어요
우리는 약을 먹이고 기도했죠
너무나도 암울한 현실에 구역질이 났어요
당신이 그날의 악몽을 봤어야했는데
*피터팬 팅커벨 네버랜드 앵무새 스미 다링부인이 을씨년스럽게 합창한다.
후크선장
(504호를 올려다보다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지금 올라가면 안 될 것 같아.
웬디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우세요?
후크선장
(바들바들 떨면서) 무섭긴 누가 무섭다고. (사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내가 무서워하는 건 시간뿐이야.
웬디
도둑이 무서워하는 건 시간뿐이겠죠.
후크선장
낮에 꿈꾸는 사람은 밤에만 꿈꾸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
웬디
나는 잘 모르겠는데……괜히 무서워서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후크선장
(달달 떨며) 똑딱똑딱똑딱.
웬디
(비아냥대며) 그렇게 무서우면 가지 마요.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후크선장
그래, 가봤자, 별 볼일 없을 거야. 그지?
웬디
겁쟁이. 무식하면 겁이 없다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요.
후크선장
나는, 학교공부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어. 배운 게 많아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배우지 않은 것들이 발목을 잡지만, 도둑들은 배우지 않은 것들을 배웠다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끊임없이 발전시키면서, 생각보다 많은 위험과 어둠을,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위험부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이용해 먹지.
웬디
(302호, 앵무새. 하얀 솜이불을 머리 위까지 다 덮어주고 방문을 닫으며) 좋으시겠어요. 잘도 이용해먹어서.
후크선장
저 늙은 여자를 내가 이용 한 게 아니라 저 늙은 여자가 나를 사용 한 거야.
웬디
뭔 말이에요?
후크선장
우리 둘 사이에는 어정쩡하게 알게 되면 굉장히 불편해지는 다 그렇고 그런 것들이 있어. 그러니 좋을 대로 생각하고 배우고 상상하라고.
웬디
(구두를 찾는다, 구두 없다, 맨발로 나갈 채비를 하다가) 겁쟁이. 겁먹었으면 겁먹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구구절절 씨알데기 없는 말만 많아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지레 상상하고 지레 겁먹는 거,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막상 보면 별 거 아닌 게 얼마나 많은데……. 배웠든 못 배웠든 앞날이 상상이 되더라도 물러서지 말아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후크선장
(유독 불안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봐, 아가씨, 지금은, 뭔가, 기분이 꺼림칙하고 이상해서 물러서야만 할 때 같다고…….
어둠속에서 조심스런 발소리 계속된다. 걸음이 멈출 때마다 조명 켜졌다가, 꺼진다. 504호 문 앞에서 조명 오래 켜진다. 초인종 소리. *웬디의 움직임은 오로지 소리로만 재연한다.
피터팬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네버랜드
야옹.
팅커벨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네버랜드
야옹. 야옹
스미
(갓난아기 같이 운다)
네버랜드
야옹. 야옹. 야, 야옹.
다링부인
아가, 아가 네 소리를 들으면 그가 집으로 뛰어와서 고양이가 쥐를 찢어 죽이듯이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거야 그리고 널 마구 때리고 또 때릴거야 곤죽이 될 때까지 때릴거야 그리고는 한, 조각, 씩……널 물어뜯어서 너를 먹어 치울, 거야.
앵무새
십오 초는 시를 낭송하기에 좋은 목소리를 가졌어요. 목울대를 가진 여자의 개수작일 뿐입니다. 팅커벨은 목에 혹이 났어요. 문을 닫았는데 죽은 쥐가 내리네. 음------, 음------, 음------, 똑딱똑딱똑딱. (눈치를 살피다가) 날거야. 날거야. 날거야. (다시 눈치를 살피다가) 잘가, 안녕, 또 봐.
네버랜드
(앵무새 앞에서 배를 발라당 뒤집어 보이며 애교를 부린다)
스미
(까르르르, 웃다가) 누구세요? (응애응애, 울다가) 누구세요? 누구신데 이 야심한 시간에 예의도 없이 벨을 누르죠? (화를 벌컥 내며) 누구냐니까! (사이) 정신 나간 년! 벨을 누르기 전에 전화를 해보든가.
504호 조명 순간 꺼진다. 꺼져 있는 동안 똑딱거리는 시계소리 계속된다. 시계소리 그치면 조명 켜진다. 웬디, 후크선장 504호 문 앞에 서있다.
웬디
죄송해요. 404호 인 줄 알고……벨을 잘못 눌렀어요. (귓속말로) 언제 오셨어요?
후크선장
(엄지손톱을 연신 깨물다가, 시계를 차고 있는 왼쪽 손목을 웬디의 귀에 갖다 대며) 똑깍똑깍똑깍. 틱톡틱톡틱톡.
웬디
뭐에요?
후크선장
시계가 안 움직이는데 초침소리가 들려. 똑깍똑깍똑깍. 틱톡틱톡틱톡.
웬디
아저씨가 입으로 시계소리를 내고 있잖아요.
후크선장
(웬디의 말이 귀에 안 들린다, 정신 나간 사람마냥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다) 멀쩡했던 시계가 어째서 고장이 났을까. 고장 난 시계가 어째서 똑깍똑깍똑깍, 틱톡틱톡틱톡, 멀쩡히 소리를 낼까. 소리는 들리는데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어. 시간은 가고 있는데 몇 분인지 알 수가 없어. 지금이 몇 초 전인지 도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웬디의 손목을 잡아끌며) 우리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쳐야해.
건물 전체, 살아있는 생물 마냥 흔들린다. 문들 열렸다가 닫히고 닫혔다가 열린다. 뻐꾸기시계 같다. 뻐꾸기들 문 밖으로 나와 뻐꾹뻐꾹 울다, 들어간다. 칠흑 같은 어둠 한동안 이어진다.
피터팬
이상한 일이지만 시간은 시계 속에 들어 있을 때만 비로소 필요해지죠.
팅커벨
이상한 일이지만 시간은 시계 속에 들어 있을 때만 비로소 이해하고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요.
앵무새
똑딱똑딱똑깍똑깍티톡티톡.
네버랜드
그릉그릉.
다링부인
(요람을 흔들면서) 이상한 일이지만 아기들은 요람 속에 들어 있을 때만 비로소 필요해져요.
스미
(요람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는)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나를 버린 엄마를 사랑해요. 나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래야만 한다고 배웠습니다.
피터팬
남의 집 일에 상관하지 말고 댁 자식들이나 잘 단도리해서 잘 키우세요들.
앵무새
똑딱똑딱똑깍똑깍티톡티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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