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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 '에는' 없어요 (4화)

프로젝트빅라이프/네버랜드'에는'없어요.

by 프로젝트빅라이프 2018. 10. 23.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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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괜한 오지랖으로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그 집일은 그 집 식구들이 알아서 하게끔 놔두는 게 피차 편하지 않겠어요?

 

정적

 

앵무새

나무 구멍이나 바위틈에 산란합시다.

 

정적

 

앵무새

날거야, 날거야, 날거야.

 

정적

 

앵무새

똑딱똑딱똑깍똑깍티톡티톡.

 

서로 눈을 마주하여 깜박이지 않고 오래 견뎌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숨 참기 대결을 한다. 모두 동시에 어깨를 크게 들었다가 놓는다. 후크선장과 웬디 301호 문턱에 앉아서 숨을 가쁘게 내쉰다.

 

웬디

(숨넘어갈 듯하다)

후크선장

(숨넘어갈 듯하다, 짐을 바리바리 싸고, 줄행랑을 친다, 두더지 마냥 이 문, 저 문에서 나온다, 그러다 다시 301호 방에서 나와 문턱에 기댄다)

웬디

(물 컵을 건네며) 누가 쫒아오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두렵고 불안하세요?

후크선장

손이 떨려서 못 마시겠어.

웬디

(갓난아기 대하듯 물을 떠먹이다가) 숨을 길게 한 번 내쉬어보세요.

후크선장

추워.

웬디

몸이 얼음장마냥 차네요.

후크선장

불어줘.

웬디

~. 다 녹아라.

후크선장

땀띠 생기겠다.

웬디

이제 그만 할까요?

후크선장

토닥토닥 쓰담쓰담 해줘.

웬디

(잠시 머뭇거리다가) 토닥토닥 쓰담쓰담.

후크선장

(웬디, 다리를 베개 삼아 누우며) 아기들이 엉금엉금 기어간 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웬디

그게 무슨…….

후크선장

내 책장 우측 네 번째 칸에 있어. 검은 실루엣을 배경으로 한 파스텔 톤의 색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동화책이지. (사이) 페기레스먼 선생님이 그렸어.

웬디

아니 무슨……(방으로 들어간다)

후크선장

아기들은 나비를 쫓아 어디까지 엉금엉금 기어갔을까. (뒤돌아보며) 이봐, 그건, 발가락이 잠들기 전에 떠나는 상상여행이라고. 울프 스타르크 선생님이 그렸지. 열 개의 발가락이 계단이 되기도 하고 다리도 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하는 환상적인 이야기이긴 한데……내가 그 새 나이를 좀 먹어서 말이야.

웬디

, . (동화책을 들고 방에서 나온다)

후크선장

토닥토닥 쓰담쓰담 해주세요.

웬디

, . (갑자기 피곤해진 표정으로) 팔랑팔랑 날아가는 나비에 정신을 빼앗긴 아기들이 엉금엉금 나비를 쫓아 기어갑니다.

후크선장

(고개를 파묻으며) 아이고 무서워라.

웬디

아기들은 나무위에 숨고, 벌 떼를 따라 숲으로 가고, 개구리를 쫓아 늪에도 갑니다. 동굴에서 박쥐도 만나네요. 그러다가 벼랑 아래로 떨어집니다.

후크선장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아이그머니. 아가들이 불쌍해요.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죠? 배고파서 울지는 않았겠죠? 울다가,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지는 않았겠죠?

웬디

(손등을 탁치며) 괜찮아요. 엉금엉금 아가들을 총총걸음으로 쫒아가는 소년이 있었으니까요. (사이) 소년이 아가들을 다 데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년은 엄마한테 칭찬을 받았습니다. 소년은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후크선장

불결해요.

웬디

?

후크선장

손발도 안 씻고 이도 안 닦고.

웬디

(점점 더 피곤해지다 짜증이 밀려온다) 소년은 돌아오자마자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치카치카도 하고 세상이 업어 가도 모르게 아주, 아주, 곤히 아주, 아주, 푸근포근한 솜이불 속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후크선장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아가들이 나무를 올랐을 때 나뭇잎은 어떤 색깔이었죠? 아가들이 벌떼를 따라 숲으로 갔을 때 숲은 어떤 색깔이었죠? 아가들이 개구리를 쫓아 늪에 갔을 때는 늪은 어떤 색깔이었죠? 노란빛과 푸른빛이 겹치던가요? 어스름 붉은 노을과 남보랏빛 밤은 몇 시 몇 분 몇 초에 시작되던가요?

웬디

두 시요, 다섯 시요, 아홉시, 열시, 열한 시요. (사이) 두 시 십분요. 다섯 시 십 일분요. 아홉시 삼 십 오 분. 열 시 오 십 육 분. 열한 시 오 십 구 분. (사이) 일초 이초 삼초 사초 오초 육초 칠초……

후크선장

(다시 눕는다,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잔다)

 

피터팬, 팅커벨, 다링부인, 스미, 앵무새, 네버랜드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소년과 아기들의 모험을 따라한다. 발아래 그림자 길어지고 짧아지기를 반복한다.

 

1234

 

 

 

스미

내 엄마가 되어 주세요.

피터팬

(짧은 침묵, 도망간다)

스미

내 엄마가 돼서 잘 자라 우리 아가, 해주세요.

팅커벨

너는 너무 뚱뚱하고 못생겼어. (도망간다)

다링부인

(한 걸음 다가가 본다) 내가 네……

스미

(도망가며) 내 엄마가 되어주세요. 혼자 밥도 잘 먹고요. 혼자 잘도 씻어요. 혼자 있어도 둘이 되어달라고 보채지도 않아요. 기저귀도 필요 없어요. 사랑스런 눈길로 입 맞춰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참 예쁜 내 아기, 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불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발로 밀어내도 괜찮아요. (네버랜드를 껴안는다)

네버랜드

(버둥거리다, 할퀸다, 하악질을 한다)

앵무새

(몸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단물 다 빠졌다.

스미

(관객석을 보며) 내 엄마가 되어주세요. (사이, 표정이 확 변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싱그러운 나무처럼 쑥쑥 자라서 시퍼렇게 멍이든 나뭇잎을 아주아주 빨갛게 물들일 거야. , 이 시끄러운 것아 지금 조용히 해 아니면 어른이 된 내가 이 길을 지나 갈 거야.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엄마, 엄마, 나는 거인이야. 뚜앙의 철탑처럼 거대하고 시커멓지. 나는 그 철탑을 턱받이 삼아 아침도 먹고 저녁도 먹지 나쁜 엄마들을 매일 잡아먹지 (다링부인 운다, 쥐 잡아 먹을 것 같은 입술로 표독스럽게) 엄마, 엄마 네 소리를 들으면 내가 집으로 뛰어와서 고양이가 쥐를 찢어 죽이듯이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거야 그리고 널 마구 때리고 또 때릴 거야 곤죽이 될 때까지 때릴거야 그리고는 한, 조각, ……

다링부인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앵무새

(슬픈 목소리로)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팅커벨

(슬픈 목소리로)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피터팬

(슬픈 목소리로) 난쟁이, 동화, 메르헨, 브라우니, 악귀, 엘프, 픽시……

네버랜드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응애……

 

 

울음. 소리내기. 옹알이. 자기소리 모방. 타인소리 모방. 표현적인 무의미한 소리. 몸짓. 배고픔. 목마름. 아픔. 불편함. 거짓 울음. 거짓 소리내기. 거짓 옹알이. 거짓 자기소리 모방. 거짓 타인소리 모방. 거짓 표현적인 무의미한 소리. 거짓 몸짓. 거짓 배고픔. 거짓 목마름. 거짓 아픔. 거짓 불편함. 모두 무용으로 표현한다.

 

후크선장

뭔가 이상하지 않아?

웬디

(후크선장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상하게 생기긴 했네요.

후크선장

아니, 나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 골목은 낮에도 어둡고 삭막해서 괜히 으스스하고 꺼림해야 정상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가로등 불빛이 환해서 기분이 좋았어. (사이) 오늘은 이상하게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심야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 뒤를 쫒아오며 젊은 아가씨들 몸을 제 것 마냥 팔아대던 아줌마들도 안보이고, 고가도로 밑쪽 인도를 혼자 걷다보면 괜히 발걸음이 빨라져야 하는데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걷는 것 마냥 느긋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집까지 걸어왔어. (사이) 이 동네가 이런 곳이 아닌데 좀 이상하지 않아?

웬디

나는 잘 모르겠던데……, 기분이 좋았으면 좋은 거지 이상할 것까지야 있겠어요?

후크선장

오늘은 어째 낯설고 이질적이었어.

웬디

그래서 두렵나요?

후크선장

지금 생각해보니 무언가 손상되거나 약화될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어.

웬디

손상되거나 약화될 만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후크선장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어.

웬디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죄다 훔친 것뿐이잖아요.

후크선장

(조금 긴 침묵) 나는 시간을 가졌어. 아니 시간을 가졌었어.

웬디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은 뺏기는 거지. 가지는 게 아니에요.

후크선장

다시 말해줘? 도둑에게 시간은……

 

모두정지

 

피터팬

(관객석을 보며) 제 시간은 지금 빚에 쫓겨 달아나고 있는 중이에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밥도 제 때 못 챙겨 먹어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친구도 없어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나이도 안 먹어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 남들 다 따는 면허증도 못 땄어요. (사이) 저도 어렸을 때는 모두가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어둡고 칙칙하고 으스스한 이 불운한 골목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너무나도 보잘 게 없어서 누가 내 시간을 빼앗았는지도 아니 시간을 뺏겼는지 조차 알 수 없어요. (사이) 이곳에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아요. 이곳에 시간은 이곳에 온전히 있어 본 적이 없어요. 이곳에 잠시나마 있어보는 시간들은 죄다 빌린 거라서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죄다 빚이에요. 이곳이 빌리지 않은 시간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불운한 일을 겪을 때에나 나타나요. (사이) 이곳을 만든 사람들은 이곳에 살지 않아요. 이곳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을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나눕니다. 그들은 부자에요. 그들은 시간을 은폐합니다. 그들은 현행범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을 강제추행하고 폭행하고 빼앗습니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합니다. 더 큰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특별사면 및 징계 면제를 실시합니다. 시간은 그들의 편입니다. 아니 시간은 그들의 것이에요.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지 마십시오. 이곳에서의 용기는 객기입니다.

 

모두 재생

 

웬디

시간은?

후크선장

몇 시 몇 분 몇 초로 보여 질 뿐이야. (잠시 생각하다가) 시계 오른 쪽 홈을 돌리면 몇 시 몇 분 몇 초도 내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있어. (사이) 오토매틱이지.

 

태엽을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인형처럼 피터팬, 팅커벨, 앵무새, 다링부인, 네버랜드, 모두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서로 부딪힌다. 짧은 정적 뒤 모두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오르골 소리를 낸다. 오르골 곡명;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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