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에 안테나들
등장인물
파란색지붕
초록색지붕
빨간색지붕
주황색지붕
장독대옥상
저수지바닥
배경
장소 내성천 주변 마을
시간 현재
1막
집집마다 지붕위에는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파란색지붕 위 옥상에서 빨래를 걷는 여자,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무 막대를 세워 매달아 놓은 안테나를 만지작거리는 초록 지붕 위에 남자,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빨간색지붕 아래 다락방 창문 열렸다가 닫힌다. 면목장갑을 낀 손만 보여서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남자, 여자 서둘러 지붕 아래로 내려간다. 한 참 뒤, 주황색 지붕 위에 사다리를 받치고 올라온 남자 지붕위에 우산을 펼쳐 놓고 두고 간다. 장독대가 있는 지붕 옥상 위에는 올라오는 사람하나 없이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꽤 오랫동안 지붕위에는 아무도 없다. 폭우를 견디지 못한 댐이 무너지면서 강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린다. 초록색 지붕위에 사다리를 놓고 남자 다시 올라와 안테나를 매만진다.
초록색지붕남자: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잘 나와?
초록색지붕여자: (지붕 위를 올려다보면서) 아니, 반대쪽으로 돌려봐, 아니 살짝살짝 조금 만 더, 그렇지, 거기, 거기. 이제 잘 잡힌다.
초록색지붕남자: 뭔 놈의 비가 이리도 모질게 내리는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려다 말고) 저 건 또 뭐야?
초록색지붕여자: 오오오오오.
초록색지붕남자: 골 넣었어?
초록색지붕여자: 페널티킥이야. 어, 어, 어, 어라?
초록색지붕남자: (웃옷 소매로 안경을 스윽 닦으며) 응? 왜? 또 끊겼어?
초록색지붕여자: 물 다 들어온다.
초록색지붕남자: 응? 골 넣었다고?
초록색지붕여자: (지붕 위로 올라온다) 물 다 들어왔다.
초록색지붕남자: 응? (안경을 다시 쓰고 주변을 둘러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마을이 물에 다 잠겼다.
초록색지붕여자: 길몽이라더니, 흉몽이었네.
초록색지붕남자: 무슨 꿈을 꿨는데?
초록색지붕여자: 하늘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는 꿈.
초록색지붕남자: 예지몽이었군. (짧은, 침묵) 그래도 그나마 우리는 지붕 위라서 다행이다.
초록색지붕여자: (지붕 맨 위로 올라가며) 물이 차오른다.
초록색지붕남자: (지붕 맨 위로 올라가며) 다 쓸려가네. 다 죽겠네.
지붕위로 사람들 다 올라온다.
파란색지붕여자: 나는 안 죽었소.
주황색지붕남자: (우산을 펼치며) 나도 안 죽었어.
빨간색지붕남자: 내가 죽였어.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이야.
장독대옥상여자: 집을 다 잃었다.
천둥번개 친다. 강한 비바람에 나무와 전신주가 꺾인다.
파란색지붕여자: (큰 소리로) 뭐라고 하셨어요?
장독대옥상여자: (큰 소리로) 집 다 잃었다고!
파란색지붕여자: (더 큰 소리로) 아니, 거기, 장독대옥상 말고 빨간색지붕 말이에요.
주황색지붕남자: (큰 소리로) 목숨하나 건졌다고!
파란색지붕여자: (더 큰 소리로) 아니, 거기, 주황색지붕 말고 빨간색지붕 말이에요.
초록색지붕남자: (큰 소리로) 다들 지붕위로 올라오셨네요.
초록색지붕여자: (큰 소리로)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파란색지붕여자: (더 큰 소리로) 아니, 거기, 빨간색 지붕 아저씨, 아까, 누굴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요?
장독대옥상여자: 집 다 잃었는데 뭐가 다행이야?
주황색지붕남자: 살다보면 살 길이 열리지 않겠어요?
장독대옥상여자: 내 나이가 일흔 하고 다섯이다. 살 길 다 닫혔어.
초록색지붕여자: (더 큰 소리로) 이봐요! 이봐!
빨간색지붕남자: (관객석을 보며) 뭘 봐요, 뭘 봐.
장독대옥상여자: 기차화통을 삶아먹었나. 저 년은 왜 아까부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지랄 이야, 지랄이.
초록색지붕여자: (목 쇤 소리로) 저 남자가 사람을 죽였데요.
비는 조금 잠잠해지고 말, 돼지, 양, 개, 닭들 지붕들을 유유히 지나 떠내려 간다.
장독대옥상여자: 하늘도 무심하시지.
초록색지붕남자: 다 죽겠네.
주황색지붕남자: 네 발 달린 짐승은 헤엄을 잘 치니 제 살길 제가 만들겠지.
장독대옥상여자: 두 발 달린 짐승은 어찌하나?
주황색지붕남자: (장독대 옥상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날아서 어딘 들 가겠지 않겠어 요?
장독대옥상여자: 가긴 어딜 가?
초록색지붕여자: 하늘이나 지붕위로요.
장독대옥상여자: (지붕 맨 끝으로 옮겨가면서) 나는 가려면 좀 남았다.
초록색지붕여자: 큰물이 지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주황색지붕남자: 큰물 작은 물이 뭐가 다를 까? 가면 가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초록색지붕남자: 큰물을 이기려하면 제 풀에 지쳐 떨어지고 큰물을 등지고 떠내려 가다보면 사는 법이죠.
초록색지붕여자: 소 한 마리가 한 십 미 터 떠내려가다가 일 미터 즈음 강가에 다가가고 또 한 십 미터 떠내려가다가 일 미터 즈음 더 강가에 다가가고 그렇게 한 수 킬 로를 내려가다가 결국 강가에 발이 닿았네요.
장독대옥상여자: (긴장을 풀며) 그, 그래?
모두 멀리 내려다본다. 그때, 파란색 지붕남자 지붕에 한참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소리친다.
빨간색지붕남자: 내가 죽였어.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파란색지붕여자: 그래요, 그래. 저, 빨간색 지붕위에 저, 사람이 죽였다고 했어요.
주황색지붕남자: 댁이 둑을 무너뜨렸나?
빨간색지붕남자: 그건 아니에요.
초록색지붕여자: (동시에) 내 꿈이 둑을 무너뜨렸어요.
장독대옥상여자: (동시에) 천재지변이었어.
초록색지붕남자: 예지몽이었죠.
주황색지붕남자: 이게 다 댐 관리소 직원들 때문이야. 그 놈들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아.
장독대옥상여자: 고놈들은 제 입 구멍은 못 막는데 남의 입 구멍은 잘 막는 놈들이야.
초록색지붕남자: 공무원이 다 그렇죠.
초록색지붕여자: 공무원이라고 다 그러겠어요?
장독대옥상여자: 모르는 소리, 그 놈들은 그러라고 시험을 보는 거야.
주황색지붕남자: 답만 줄줄 외워서 찍찍 찍으니 주관식을 풀 수가 있나. 보나마나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둑이 다 무너질 때까지 전화 통이나 붙잡고 있었을 게 뻔해.
장독대옥상여자: 쳐 죽일 놈들!
주황색지붕남자: 놈들은 사람들을 일부러 번거롭고 까다롭게 만들고는 매번 똑같은 말투로 사 과를 하지.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장독대옥상여자: 욱시랄놈들!
초록색지붕여자: 아! 방금도 제가 구해달라고 했는데 저희 소관이 아니라고 전화를 뚝 끊었었 어요.
초록색지붕남자: 어디다 전화해서 뭐라고 한 건데?
초록색지붕여자: 지금 어디에 전화해서 뭐라고 한 게 중요해?
초록색지붕남자: 당연히 중요하지. 목숨이 달린 일인데.
초록색지붕여자: 자장면 집에 전화라도 했을까봐?
빨간색지붕남자: 나는 짬뽕.
주황색지붕남자: 나는 자장면 곱빼기.
장독대옥상여자: 나는 간짜장. 서비스로 군만두 좀 많이 달라고 해.
천둥번개 친다. 조명 깜박인다. 빗줄기 잠잠 해질 때까지 모두 지붕위에서 쭈그리고 앉아 먼 곳을 응시한다.
초록색지붕여자: 물이 불어난다.
장독대옥상여자: 몸이 오슬오슬 춥구먼.
주황색지붕남자: 자장면이 다 불어 터지겠다.
초록색지붕남자: 아홉시 뉴스에 나오겠네.
장독대옥상여자: 그 전에 얼어 죽겠다.
주황색지붕남자: 장독에 들어가 계셔요. 그럼 좀 답답해도 얼어 죽지는 않겠죠.
빨간색지붕남자: 저는 사람을 죽였어요.
천둥번개 친다. 조명 깜박인다. 빗줄기 잠잠해질 때까지 모두 지붕위에서 쭈그리고 앉아 빨간색지붕남자를 응시한다.
초록색지붕여자: 사람을 죽였데요.
초록색지붕남자: 아홉시 뉴스에 나오겠다.
장독대옥상여자: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양반이네.
주황색지붕남자: (동시에) 그러고 보니 우리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파란색지붕여자: (동시에) 누굴 죽인 거죠?
빨간색지붕남자: (동시에) 저는 이 동네에 사람이 사는 줄도 몰랐어요.
장독대옥상여자: 사람이 사는 줄도 모르는 동네에서 사람을 죽였다니 대단한 양반이군.
주황색지붕남자: 어쩌다가 죽인거지?
초록색지붕여자: 꿈이 딱 맞아 떨어지네요.
초록색지붕남자: 그거 참 신통방통하다.
파란색지붕여자: 설마, 더 죽일 사람이 남은 건 아니겠죠?
빨간색지붕남자: 실수였어요.
파란색지붕여자: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죠.
주황색지붕남자: 큰 실수를 했군.
장독대옥상여자: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야.
빗줄기 잠잠해진다. 모두 지붕위에 서서 말이 없다.
초록색지붕남자: 누가 이겼을까?
초록색지붕여자: 골을 넣었다면 비겼겠지.
주황색지붕남자: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나? 이긴 놈이 내 편이지.
장독대옥상여자: 비긴 놈은?
주황색지붕남자: 승부의 세계는 냉정해요. 비긴 놈은 쓸모없죠.
파란색지붕여자: 아니, 그런데, 어떻게, 늘, 이기기만, 하겠어요? (빨간색 지붕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뭐 그런 거지.
장독대옥상여자: 그래, 그렇게, 돌고, 돌다가, 그렇고 그렇게 죽을 뻔도 하고 죽일 뻔도 하는 것이 세상사지.
비, 다 그쳤다. 멀리서 소 울음소리 애달프게 들린다.
지붕위에 안테나들 -막- (0) | 2018.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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