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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위에 안테나들 -3화-

프로젝트빅라이프/지붕위에안테나들

by 프로젝트빅라이프 2018. 10. 2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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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다음날 밤. 같은 장소.

모두 지붕위에 앉아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다.

 

장독대옥상여자: 벌써 소문이 다 났나보다.

주황색지붕남자: 저수지 둔덕에 죄다 깔렸네요.

장독대옥상여자: 사람 시체를 뜯어먹은 물고기들이 맛이 좋은 법이지.

주황색지붕남자: 살이 통통한 물고기들이 물길을 따라 내려가네요.

장독대옥상여자: 고놈 참 맛나겠다.

주황색지붕남자: 양념장 끓인 물에 팔팔 끓여서 먹으면 참 좋겠어요.

장독대옥상여자: (장독 뚜껑을 열며) 옛다, 된장이다.

주황색지붕남자: 요새는 물고기도 입이 까다로워서 된장 가지고는 안돼요.

장독대옥상여자: 하긴 사람 고기 맛을 봤으니 뭔들 입에 맞을까?

주황색지붕남자: 호랑이도 아니고 물고기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장독대옥상여자: 그럼?

주황색지붕남자: 요새 물고기들은 바늘에 꿴 미끼를 좋아해요. 그걸 사람말로 코 꿴다고 하죠.

장독대옥상여자: 참 내 사기를 칠거면 좀 창의적로다가 쳐라. 물고기가 코가 어디 있다고.

주황색지붕남자: 코가 없는 동물이 어디 있어요?

빨간색지붕남자: 코가 아니라 콧구멍이겠죠.

파란색지붕여자: 코를 꿰는 게 아니라 입을 꿰는 거겠죠.

초록색지붕남자: 요새는 죄다 플라이 낚시에요.

초록색지붕여자: 물고기만 손해 보는 장사죠.

초록색지붕남자: 요새 사람들은 정정당당하지 못해요.

초록색지붕여자: 가짜로 진짜를 낚아요.

초록색지붕남자: 죄다 뺏어가면서 밥도 안줘요.

장독대옥상여자: 옛날에는 구씨를 썼는데. 요새 것들은 정이 없어.

초록색지붕남자: 구씨가 뭐죠?

장독대옥상여자: 꼬물꼬물 귀여운 구더기 말이야. 구더기.

초록색지붕여자: (비꼬며) 고거 참 귀엽기도 하겠네요.

주황색지붕남자: 얼마 전에는 수십 마리의 파리 떼가 동시에 하늘로 비상하는 장관도 봤었지.

초록색지붕여자: (비꼬며) 고거 참 예쁘기도 했겠네요.

장독대옥상여자: 뭘 모르는 사람들은 구씨가 더럽고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 지만 뭘 좀 아는 사람들은 고것들이 먹여 살리는 것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놀 랍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대단하고 굉장하다고 말하지.

초록색지붕여자: (비꼬며) 뭘 좀 아셔서 좋겠네요.

주황색지붕남자: 뭘 좀 알았으면 더 살지 그랬어요?

장독대옥상여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절 추녀에 단 풍경소리, 은은하다.

 

빨간색지붕남자: 어쩌다가들 여기까지 오게 되셨어요?

장독대옥상여자: 가슴속에 천불이 나서 열이나 식힐까, 하고 왔었지.

주황색지붕남자: 나는 물고기나 잡을까, 하고 왔었지.

초록색지붕여자: 나는 여기가 그냥 제일 좋더라고요.

초록색지붕남자: 나도 여기가 그냥 딱 마음에 들더라고요.

장독대옥상여자: 천생연분이구만.

초록색지붕여자: 죽고 나서 만난 게 좀 아쉽지만, .

초록색지붕남자: 너 죽고 나 죽자 할 일 없으니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

파란색지붕여자: (빨간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저는 두렵고 무섭고 어려웠어요.

빨간색지붕남자: (파란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뭐가요?

파란색지붕여자: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혼자 중얼중얼 거리던 것들이 모두.

빨간색지붕남자: (빨간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언제부터 혼자였나요?

파란색지붕여자: 어쩌다보니.

빨간색지붕남자: 어쩌다보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파란색지붕여자: (파란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둘이거나 셋이거나 할 때도 있었는데 어쩌 다보면 늘 혼자가 되어있었죠.

빨간색지붕남자: (파란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저도 늘 그랬어요.

파란색지붕여자: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그러나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아요.

장독대옥상여자: (주황색지붕위로 폴짝 뛰어가,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지랄들 한다, 지랄을. 그지?

주황색지붕남자: 무거워요. 머리 좀 치워요.

장독대옥상여자: 요새는 연상연하가 유행이래.

 

모두 지붕위에 짝을 지어 앉아서 풍경소리 오랫동안 듣는다.

 

주황색지붕남자: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요?

장독대옥상여자: 자기라고 불러.

 

모두 지붕위에 누워 풍경소리 오랫동안 듣는다.

 

빨간색지붕남자: 어째서 절 추녀 밑 풍경에 물고기를 매달아 놨을까요?

파란색지붕여자: 글쎄요. 왜 그럴까요?

장독대옥상여자: 물고기들은 눈을 감는 법이 없거든.

주황색지붕남자: 자나 깨나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않지.

초록색지붕여자: 그게 마치 우리 같네요.

초록색지붕남자: 그런가?

빨간색지붕남자: 나는 한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 눈이 아픈데.

 

억새풀 사각사각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물고기가 물위로 솟아올랐다가 다 시 가라앉는 소리 연이어 들린다.

장독대옥상여자: (벌떡 일어나며) 아직 덜 죽었나.

주황색지붕남자: (벌떡 일어나며) 설마요.

초록색지붕여자: 누구는 좋다 말았겠네.

초록색지붕남자: 죽은 지 얼마 안됐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장독대지붕여자: 뭐 그럴 수도.

주황색지붕남자: 뭐 개인차가 있는 거니까.

파란색지붕여자: 저 좀 봐요.

빨간색지붕남자: ?

파란색지붕여자: 두툼하고 투명한 눈꺼풀이 나고 있어야하는데……

 

모두 파란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온다.

 

초록색지붕남자: (동시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초록색지붕여자: (동시에) 귀신이 곡도 못할 노릇이네.

장독대옥상여자: (동시에) 반 송장이구만.

주황색지붕남자: (동시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네.

빨간색지붕남자: (동시에) 왜들 이러시는지?

파란색지붕여자: (동시에) , 아직은 모르는 거니까.

 

모두 긴 침묵.

 

빨간색지붕남자: 이봐요.

 

모두 각자의 지붕위로 흩어진다. 한동안 말이 없다.

 

장독대옥상여자: 고년이 실수를 할 때가 다 있네.

초록색지붕여자: 어째 물이 다 차올라 지붕을 다 덮지 않더라니.

초록색지붕남자: 어째 생긴 것부터가 재수가 없었어.

주황색지붕남자: 이제 이 놀이도 못해 먹겠다.

파란색지붕여자: 무서워요.

장독대옥상여자: 괜찮아. 죽어보면 별 일이 다 있는 거지.

빨간색지붕남자: 살다보면 이겠죠.

주황색지붕남자: (무시하며) 똥 밟았다 생각해.

빨간색지붕남자: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주황색지붕남자: (무시하며) 깨끗한 물로 온몸을 구석구석 씻으라고.

장독대옥상여자: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야해.

파란색지붕여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시 모르잖아요.

장독대옥상여자: ?

파란색지붕여자: 죽다 살다 하다가 죽어버릴지도.

장독대옥상여자: 죽어도 여기서는 안 죽을 걸.

파란색지붕여자: 어떡해요. (손으로 온 몸을 박박 문지른다) 냄새가 안 없어져요.

장독대옥상여자: 산 사람하고 몸 부대끼면 하늘로 올라간다더라.

초록색지붕남자: 하늘 위가 지붕위보다 나을 지도요.

초록색지붕여자: 그래요. 힘내세요. , 별일이야 있을, 라고요.

파란색지붕여자: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초록색지붕여자: 하긴.

파란색지붕여자: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빨간색지붕남자: (빨간색 지붕위로 폴짝 뛰어가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요.

 

모두 질색하며 지붕 위를 왔다갔다 폴짝폴짝 넘나들다 제자리로 돌아간다.

 

빨간색지붕남자: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저수지바닥여자: 잘못한 건 없고 잘못 될까봐 그런 거예요.

빨간색지붕남자: ? (침묵. 지붕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수지바닥여자: 어릴 때 할아버지가 야밤에 혼자 저수지 쪽으로 가지 말라고는 안하던가요?

빨간색지붕남자: 그거야 밤에 저수지가 있는 길을 지나다가 발을 헛디딜까봐, 할아버지들이 의례 하는 소리 아닙니까!

저수지바닥여자: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빨간색지붕남자: 그래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어요. (침묵. 지붕 아래로 내려가려 애쓴 다, 그러다가 괜히 무서워졌는지 다시 올라간다)

저수지바닥여자: 나를 보세요. 나를 봐. 물에 퉁퉁 불어 터진 끔찍한 내 몰골을 좀 봐요.

주황색지붕남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요.

저수지바닥여자: 나를 보세요. 나를 봐. 불에 타 두 손 두 발 다 오그라진 내 몰골을 좀 봐요.

장독대옥상여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요.

저수지바닥여자: 나를 보세요. 나를 봐. 손발이 묶인 채 발가벗겨진 내 몰골을 좀 봐요.

초록색지붕남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요.

저수지바닥여자: 나를 보세요. 나를 봐. 귀와 손가락 발가락 모두 절단된 채 산채로 파묻힌 내 몰골을 좀 봐요.

초록색지붕여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요.

저수지바닥여자: 나를 보세요. 나를 봐. 산채로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붉은 대야에 한가 득 피를 쏟아내던 내 몰골을 좀 봐요.

 

모두 일제히 파란지붕여자를 바라본다.

 

파란색지붕여자: 도대체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저렇게나 끔찍한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 저는 어릴 때부터 겁이 많아서 피만 보면 그냥 너무 징그럽 고 무서워서 얼굴을 돌리고 눈만 조심스럽게 흘낏 거렸었는데, 어째서, 그때 는 그런 것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을까요?

빨간색지붕남자: 최근에 저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화나게 하고 저를 부 끄럽게 만드는 사람들 말고, 저를 모르는, 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에 속 한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짓이기고 뜯어내면서너도 내가 속한 고통 속 에서 허덕여봐라. 너도 내가 키워가는 분노와 슬픔의 질곡 속에서 괜찮다고 거짓말을 해 보거라. 너도 모두의 무관심속에서 살아가면서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야라고 자기최면을 걸어 보거라.

모두 흐느낀다. 야심한 밤에 들리는 귀신울음소리 같다.

 

저수지바닥여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네요.

 

모두 흐느끼다 순간 울음을 뚝 그친다. 빨래를 널고 안테나를 세우고 장독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빨간색지붕남자: 왜 그랬을까요?

파란색지붕여자: 사람만큼 무서운 게 없고.

주황색지붕남자: 사람만큼 더러운 게 없고.

장독대옥상여자: 사람만큼 변덕스러운 게 없고.

초록색지붕여자: 사람만큼 야멸차고.

초록색지붕남자: 사람만큼 잔인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파란색지붕여자: 사사건건 간섭하고 감시하고 통제하고 괴롭히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저수지바닥여자: 왜 그럴까요?

주황색지붕남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파란색지붕여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초록색지붕남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초록색지붕여자: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습니다.

장독대지붕여자: 본의는 아니었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 난들 어찌하겠나.

빨간색지붕남자: 이봐요 도대체…….

주황색지붕남자: 실수였어요.

초록색지붕여자: 착오였어요.

초록색지붕남자: 기억이 안나요.

파란색지붕여자: 몰라요. 몰라.

저수지바닥여자: 살인마들!

빨간색지붕남자: (긴 침묵 뒤, 갑자기 화가 나서)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사람을 죽인 게 아 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 여자한테 속은 거예요. 저 여자가 이 모든 걸 유도 한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먼저 다가와서 유혹했어요. 가만히 있는데 몸을 이 리저리 꼬고 눈을 요망하게 흘기면서 죽일 테면 죽여 보라고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면서 먼저 덤볐어요.

파란색지붕여자: 사랑이라면서요?

초록색지붕남자: 그냥 지나가는 바람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물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옷 깃 한 번 스치는 인연도 아니라면서요?

초록색지붕여자: 그냥 저냥 이유 없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장독대옥상여자: 열 귀신은 알아도 한 사람은 모른다더니. 옛날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주황색지붕남자: 그런 말이 있던가요? 하기야 뭐 말이야 만들면 그만이니.

저수지바닥여자: 솔직히 죽은 사람 또 죽이는 게 뭔 대수인가 싶죠?

 

모두, 빨간색 지붕남자를 벌레 보듯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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